드라마는 장르 특성상 픽션(허구)을 다룬다. 인기 드라마 <사랑의 불시착>도 마찬가지다.
<사랑의 불시착>의 기본 내용은 허구지만, 여러 대목에서 북한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 꼼꼼하게 살펴보면, 열악한 북한 보건의료 상황을 엿볼 만한 장면이 있다. 극중 북한군 중대장 리정혁이 한국 재벌 딸 윤세리를 보호하다 총에 맞아 정신을 잃었다. 윤세리가 차량을 운전해 출혈이 심한 리정혁을 근처 사리원인민병원으로 데려갔다. 그런데 막상 도착한 병원에선 ‘수혈할 피가 없으니 피를 구해오라’고 한다.
<사랑의 불시착>, 북 의료 현실 반영
극중에서 도청이 직업(귀때기)인 만복은 리정혁에게 리무혁(정혁의 형)이 자신을 도와준 사람이라 고백한다. 10년 전 만복의 아기가 아팠을 때 병원에 갔으나 ‘약이 없다. 주사약을 직접 구해오면 치료할 수 있다’는 말을 듣는다. 만복이 절망에 빠져 있을 때 리무혁이 약을 구해 나타난다.
탈북 의료인 등의 말을 들어보면, 실제 도 단위 아래 북한 병원에는 필수의약품과 소독제, 마취제가 없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2000년 이후 북한에서는 시장과 개인약국에서 의약품을 팔고 있다. 서울대 의대 박상민 교수가 2013년 북한이탈주민 209명에게 한 조사 결과를 보면, 응답자의 69%가 “장마당에서 약을 산 경험이 있다”고 대답했다. <사랑의 불시착>에서 시 단위 병원인 사리원병원에 수혈할 피가 없고, 치료약을 환자가 장마당에서 구해와야 하는 설정이 터무니없는 이야기는 아 니다.
북한 보건의료체계는 무상의료, 예방의학제도 등으로 짜여 있다. 1990년대 중반까지 유지되던 이 체계는 경제난과 식량난이 닥친 1990년대 후반 이후 무너졌다. 보건의료체계가 무너지고 기아와 함께 전염병이 번져 많은 사람이 숨졌다.
보건의료체계가 허술한 북한은 전염병에 민감하게 반응해왔다. 북한은 1월28일 코로나19에 맞서 국가비상방역체계로 전환했다. 북한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1월29일치)은 “신형 코로나비루스(바이러스) 감염증의 전파를 막기 위한 사업을 국가 존망과 관련된 중대한 정치적 문제로 여기고 정치사업을 강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북한의 이런 태도는 코로나19가 체제 불안과 불안정을 가중하는 요인으로 번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최근 중국과 일본에서 코로나19 대응과 관련한 혼선으로 시진핑 주석, 아베 신조 총리의 리더십이 흔들리고 있다.
북한은 아예 국경을 닫았다. 1월31일 북한과 중국을 오가는 모든 항공기와 열차 운행을 중단했다. 북한은 인민군 창설기념일인 2월8일 건군절 행사를 전혀 하지 않았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2012년 집권 이후 한 해도 빠지지 않고 대규모 건군절 행사를 치렀다.
북, 국경 닫고 김 위원장 공개활동 중단
평소 2~3일에 한 번꼴로 공개활동을 하던 김 위원장은 1월25일(설 공연 관람) 이후 3주가량 공개활동을 하지 않았다.
북한은 코로나19를 ‘국가 존망의 중대 정치문제’로 규정했다. 이런 대응을 ‘보건의료 상황이 허술한 탓’이라고 깎아내릴 일만은 아니다.
코로나19 확산에 세계가 긴장하고 있다. 이미 여러 나라가 코로나19를 단순한 전염병이 아니라 안보 차원에서 접근하고 있다. 여러 해 전부터 전문가들은 전염병이나 기후변화 등을 새로운 안보(신안보) 위협으로 규정하고 대책 마련을 주문해왔다.
신안보는 국제사회가 적대국 군사 위협이란 기존 안보 개념과 구별하려고 만든 개념이다. 전염병, 기후변화, 환경오염, 테러, 사이버 공격 등이 신안보 위협에 해당한다.
보건과 기후변화는 신안보의 핵심 이슈다. 1970년대 이후 90년대 중반까지 인간과 동물에게 큰 위협을 주는 새로운 전염병이 계속 나타났다. 미국 등 여러 나라가 전염병을 단순 공중보건 차원이 아니라 새로운 안보 위협으로 인식했다. 90년대 이후 군사 위협 대응에 치우친 안보 개념 확대를 요구하는 시대적 상황과 맞물려 공중보건과 국가안보를 결합한 ‘보건안보’란 용어가 등장했다.
2000년 미 중앙정보국(CIA) 특별보고서는 지구 차원의 전염병 위협을 비전통적 또는 새로운 안보 위협으로 규정했다. 이 보고서는 보건안보 개념을 국가안보 차원을 넘어 글로벌 보건안보라는 개념으로 확장하는 새로운 미국 보건정책을 제안했다.
2015년 다보스포럼은 글로벌 리스크 보고서를 발표해, 앞으로 10년 동안 세계경제 위협 요인 5가지를 선정했다. 수자원 위기, 급속한 전염병 확산을 1, 2위로 꼽았다. 다음은 대량살상무기(3위), 국가 간 분쟁(4위), 기후변화 대응 실패(5위)였다.
전통 안보는 위협을 주는 상대를 적으로 상정하고 상대방의 군사력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대결과 갈등의 구조’에 기반하고 있다. 전통 안보는 국경 밖에서 가해지는 군사적 위협에 대처하는 것이다. 이와 달리 전염병 등 신안보 위협은 한 국가에만 국한되지 않고 국경을 초월해 영향을 미친다. 사람과 물자가 국경을 넘나드는 상황에서 파급 속도는 빨라지고 영향력은 커진다. 신안보는 공동의 위협에 대응하는 국가 간 협력이 필요한 ‘협력과 상생의 구조’에 터 잡고 있다.
전염병은 경계를 넘나드는 초국경적 특성으로 한 국가가 독자 대응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이영훈 에스케이(SK)경영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은 2월4일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린 한국언론진흥재단(KPF) 포럼에서 “전염병, 수해 등의 재난은 북한만이 아니라 한반도 전체의 문제이기 때문에 이번 기회를 적극 활용해 재난에 대한 남북한 협력 방안을 제도화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2월 초 국책연구기관인 통일연구원과 국가안보전략연구원도 ‘감염병 확산 방지를 위한 남북협력’ 방안을 제안했다.
정부는 신중한 태도다. 통일부는 2월19일 국제기구의 공식 요청이 있다면 코로나19 대북 지원을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현재 세계보건기구(WHO), 유엔아동기금(유니세프)이 대북 방역을 지원하고 있다.
“북 감염병 확산, 남에도 위협”
코로나19 남북협력이 구체화하면 ‘우리 형편이 급한데 북한 도와줄 처지냐’라고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북한 내 감염병 확산 방지는 일방적 지원이 아니라 남한과 한반도 주변 국가에도 도움이 되는 일이다.
“북한 내부에서 감염병이 통제되지 못하고 크게 확산되면 남한에도 막대한 영향이 미칠 수 있다. 한반도와 같이 면적이 좁은 반면에 수도권 등 특정 지역에 많은 인구가 밀집해 있는 지역에서는 국경을 초월한 협력이 더욱 필수적일 수밖에 없다.”(국가안보전략연구원 이슈브리핑 ‘감염병 확산과 남북협력’)
권혁철 한겨레평화연구소장 nura@hani.co.kr
2020-02-21 한겨레21 원문보기
드라마는 장르 특성상 픽션(허구)을 다룬다. 인기 드라마 <사랑의 불시착>도 마찬가지다.
<사랑의 불시착>의 기본 내용은 허구지만, 여러 대목에서 북한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 꼼꼼하게 살펴보면, 열악한 북한 보건의료 상황을 엿볼 만한 장면이 있다. 극중 북한군 중대장 리정혁이 한국 재벌 딸 윤세리를 보호하다 총에 맞아 정신을 잃었다. 윤세리가 차량을 운전해 출혈이 심한 리정혁을 근처 사리원인민병원으로 데려갔다. 그런데 막상 도착한 병원에선 ‘수혈할 피가 없으니 피를 구해오라’고 한다.
<사랑의 불시착>, 북 의료 현실 반영
극중에서 도청이 직업(귀때기)인 만복은 리정혁에게 리무혁(정혁의 형)이 자신을 도와준 사람이라 고백한다. 10년 전 만복의 아기가 아팠을 때 병원에 갔으나 ‘약이 없다. 주사약을 직접 구해오면 치료할 수 있다’는 말을 듣는다. 만복이 절망에 빠져 있을 때 리무혁이 약을 구해 나타난다.
탈북 의료인 등의 말을 들어보면, 실제 도 단위 아래 북한 병원에는 필수의약품과 소독제, 마취제가 없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2000년 이후 북한에서는 시장과 개인약국에서 의약품을 팔고 있다. 서울대 의대 박상민 교수가 2013년 북한이탈주민 209명에게 한 조사 결과를 보면, 응답자의 69%가 “장마당에서 약을 산 경험이 있다”고 대답했다. <사랑의 불시착>에서 시 단위 병원인 사리원병원에 수혈할 피가 없고, 치료약을 환자가 장마당에서 구해와야 하는 설정이 터무니없는 이야기는 아 니다.
북한 보건의료체계는 무상의료, 예방의학제도 등으로 짜여 있다. 1990년대 중반까지 유지되던 이 체계는 경제난과 식량난이 닥친 1990년대 후반 이후 무너졌다. 보건의료체계가 무너지고 기아와 함께 전염병이 번져 많은 사람이 숨졌다.
보건의료체계가 허술한 북한은 전염병에 민감하게 반응해왔다. 북한은 1월28일 코로나19에 맞서 국가비상방역체계로 전환했다. 북한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1월29일치)은 “신형 코로나비루스(바이러스) 감염증의 전파를 막기 위한 사업을 국가 존망과 관련된 중대한 정치적 문제로 여기고 정치사업을 강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북한의 이런 태도는 코로나19가 체제 불안과 불안정을 가중하는 요인으로 번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최근 중국과 일본에서 코로나19 대응과 관련한 혼선으로 시진핑 주석, 아베 신조 총리의 리더십이 흔들리고 있다.
북한은 아예 국경을 닫았다. 1월31일 북한과 중국을 오가는 모든 항공기와 열차 운행을 중단했다. 북한은 인민군 창설기념일인 2월8일 건군절 행사를 전혀 하지 않았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2012년 집권 이후 한 해도 빠지지 않고 대규모 건군절 행사를 치렀다.
북, 국경 닫고 김 위원장 공개활동 중단
평소 2~3일에 한 번꼴로 공개활동을 하던 김 위원장은 1월25일(설 공연 관람) 이후 3주가량 공개활동을 하지 않았다.
북한은 코로나19를 ‘국가 존망의 중대 정치문제’로 규정했다. 이런 대응을 ‘보건의료 상황이 허술한 탓’이라고 깎아내릴 일만은 아니다.
코로나19 확산에 세계가 긴장하고 있다. 이미 여러 나라가 코로나19를 단순한 전염병이 아니라 안보 차원에서 접근하고 있다. 여러 해 전부터 전문가들은 전염병이나 기후변화 등을 새로운 안보(신안보) 위협으로 규정하고 대책 마련을 주문해왔다.
신안보는 국제사회가 적대국 군사 위협이란 기존 안보 개념과 구별하려고 만든 개념이다. 전염병, 기후변화, 환경오염, 테러, 사이버 공격 등이 신안보 위협에 해당한다.
보건과 기후변화는 신안보의 핵심 이슈다. 1970년대 이후 90년대 중반까지 인간과 동물에게 큰 위협을 주는 새로운 전염병이 계속 나타났다. 미국 등 여러 나라가 전염병을 단순 공중보건 차원이 아니라 새로운 안보 위협으로 인식했다. 90년대 이후 군사 위협 대응에 치우친 안보 개념 확대를 요구하는 시대적 상황과 맞물려 공중보건과 국가안보를 결합한 ‘보건안보’란 용어가 등장했다.
2000년 미 중앙정보국(CIA) 특별보고서는 지구 차원의 전염병 위협을 비전통적 또는 새로운 안보 위협으로 규정했다. 이 보고서는 보건안보 개념을 국가안보 차원을 넘어 글로벌 보건안보라는 개념으로 확장하는 새로운 미국 보건정책을 제안했다.
2015년 다보스포럼은 글로벌 리스크 보고서를 발표해, 앞으로 10년 동안 세계경제 위협 요인 5가지를 선정했다. 수자원 위기, 급속한 전염병 확산을 1, 2위로 꼽았다. 다음은 대량살상무기(3위), 국가 간 분쟁(4위), 기후변화 대응 실패(5위)였다.
전통 안보는 위협을 주는 상대를 적으로 상정하고 상대방의 군사력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대결과 갈등의 구조’에 기반하고 있다. 전통 안보는 국경 밖에서 가해지는 군사적 위협에 대처하는 것이다. 이와 달리 전염병 등 신안보 위협은 한 국가에만 국한되지 않고 국경을 초월해 영향을 미친다. 사람과 물자가 국경을 넘나드는 상황에서 파급 속도는 빨라지고 영향력은 커진다. 신안보는 공동의 위협에 대응하는 국가 간 협력이 필요한 ‘협력과 상생의 구조’에 터 잡고 있다.
전염병은 경계를 넘나드는 초국경적 특성으로 한 국가가 독자 대응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이영훈 에스케이(SK)경영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은 2월4일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린 한국언론진흥재단(KPF) 포럼에서 “전염병, 수해 등의 재난은 북한만이 아니라 한반도 전체의 문제이기 때문에 이번 기회를 적극 활용해 재난에 대한 남북한 협력 방안을 제도화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2월 초 국책연구기관인 통일연구원과 국가안보전략연구원도 ‘감염병 확산 방지를 위한 남북협력’ 방안을 제안했다.
정부는 신중한 태도다. 통일부는 2월19일 국제기구의 공식 요청이 있다면 코로나19 대북 지원을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현재 세계보건기구(WHO), 유엔아동기금(유니세프)이 대북 방역을 지원하고 있다.
“북 감염병 확산, 남에도 위협”
코로나19 남북협력이 구체화하면 ‘우리 형편이 급한데 북한 도와줄 처지냐’라고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북한 내 감염병 확산 방지는 일방적 지원이 아니라 남한과 한반도 주변 국가에도 도움이 되는 일이다.
“북한 내부에서 감염병이 통제되지 못하고 크게 확산되면 남한에도 막대한 영향이 미칠 수 있다. 한반도와 같이 면적이 좁은 반면에 수도권 등 특정 지역에 많은 인구가 밀집해 있는 지역에서는 국경을 초월한 협력이 더욱 필수적일 수밖에 없다.”(국가안보전략연구원 이슈브리핑 ‘감염병 확산과 남북협력’)
권혁철 한겨레평화연구소장 nura@hani.co.kr
2020-02-21 한겨레21 원문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