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70년이 지났지만, 한반도의 평화는 여전히 냉전과 분단의 그늘 밑에 놓여 있다. 남북관계는 주기적으로 롤러코스터를 타고, 한반도 주변국들은 현상유지와 현상변경 간의 힘겨루기를 하며 흙먼지를 일으키고 있다. 홍석률(55) 성신여대 사학과 교수는 지난 24일 한겨레신문사에서 진행한 인터뷰에서 “한반도에서 평화를 유지하는 제도적이고 구조적인 장치가 대단히 취약하다”면서도 “남북한이 스스로 뭔가 해볼 수 있는 여지는 해방 직후보다는 상대적으로 훨씬 커졌다”고 진단했다. 홍 교수는 한반도 분단사를 냉전사 맥락에서 연구해온 학자로, 현재 한국냉전학회 부회장을 맡고 있다. ―최근 상황에서도 볼 수 있듯이, 한반도 정세는 불안한 평화와 긴장 고조의 반복이 ‘뉴노멀’이 된 것 같다.
“2018년 남북정상회담 무렵 사람들이 기분 좋게 평양냉면을 먹으러 다닌 것이 엊그제 같은데, 최근엔 남북의 군사충돌 위험까지 운운하기도 했다. 한반도 상황이 변덕스러운 근본적인 이유는 평화를 유지하는 제도적이고 구조적인 장치가 대단히 취약하기 때문이다. 한반도에서 평화를 유지하는 유일한 제도적 장치는 정전협정인데, 국가와 국가 사이의 협정이 아니라 군사적인 문제에 국한해 군사령관끼리 맺은 협정에 불과하다. 군사분계선 정도를 제외하면 정전협정에 있는 대부분의 조항은 현재 지켜지지 않고 있다. 중립국감독위원회는 1950년대부터 주요 기능을 상실했고, 정전협정에서 제일 중요한 기구인 군사정전위원회는 1990년대부터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다. 결국 한반도의 평화는 어떤 제도적 장치를 통해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양쪽의 전쟁 억제력에 의존하여 유지되는 형편이다. 이런 상황은 당연히 유동적일 수밖에 없다. 또한 한반도 문제에 관계하는 것은 남북한뿐 아니라 주변 강대국이 있는데 모두 세계적인 강대국들이어서 문제가 복잡하다.”
―김대중, 노무현, 문재인 정부에선 적극적인 평화환경 개선을 시도했고 북한도 일정하게 호응한 측면이 있는데 근본적인 질서의 전환을 가져오지는 못한 것 같다. 제도적·구조적 제약을 뛰어넘지 못하는 남북의 영향력 한계를 보여주는 것일까? “올해가 한국전쟁 70주년인데, 전쟁의 공식적인 종결 없이 정전 상태로 70년을 가는 것은 동서고금의 역사에서 유례를 찾기 힘들다. 평화정착을 위해선 전쟁을 했던 당사자들이 평화협정을 맺는 것이 가장 확실한 방법이지만, 사실 세계적으로도 2차 대전 이후 평화협정으로 전쟁을 깔끔하게 정리한 사례가 많지 않다. 그렇다면 종전선언을 한다든지, 아니면 전쟁에 참여했던 나라들이 실질적으로 모두 관계 개선을 하면 평화가 정착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한반도에선 이런 실질적인 평화정착마저도 문제가 있다. 북한과 미국, 북한과 일본의 관계 개선이 안 됐기 때문이다. 이 부분을 근본적으로 바꾸지 못해 유동성이 계속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그동안 한반도 냉전, 분단 체제를 해체하려는 세력의 노력이 헛수고였느냐고 묻는다면, 저는 절대로 ‘그렇지 않다’고 대답할 것이다. 한반도 상황은 ‘다소 평온한 대치 상태’와 ‘전쟁 위기’를 왔다 갔다 하는 것인데, 그나마 최악의 사태로 가는 것을 예방하려는 나름의 노력과 움직임으로 상황을 그때그때마다 반전시켜왔기 때문에 전쟁 재발이라는 파국만은 막을 수 있었다. 긴 흐름으로 보면 지금의 남북관계나 북-미 관계는 과거에 비하면 진전된 측면도 확실히 있다.”
―북-미 정상회담을 두차례 했지만, 존 볼턴 회고록을 보면 북-미 관계에 실질적인 진전이 있었다고 평가하기는 어렵지 않을까? “그래도 좋은 선례를 남겼다고 볼 수 있다. 과거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었던, 북한의 정상과 미국 대통령이 만났다는 사실 자체가 이전과 비교하면 상황을 많이 바꿔 놓은 것이다. 남북관계든 국제관계든 정치인들은 정치적인 이해관계 때문에 행동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게 정치인 개인만의 이해관계는 아니다. 기본적으로 정치인들은 자기들 국민의 요구에 부응해야 하므로 여론을 신경 쓸 수밖에 없다. 따라서 북-미 정상회담은 트럼프이기 때문에 가능한 부분도 있지만, 성사 과정에는 적어도 60% 정도는 이 땅에서 한반도 평화를 추구했던 세력의 노력, 북한이 미국과 대화하려고 노력한 것, 그리고 미국 내에서 전쟁을 원하지 않는 여론 등이 밑바탕에서 작용한 것으로 본다. 그래서 트럼프 대통령이 재선에 실패하고 새로운 미국 행정부가 들어선다 하더라도 북-미 대화를 지지하는 물밑 토대는 상당 부분 남아 있을 것으로 본다.”
―코로나19 이후 미국과 중국의 갈등이 격화되는 양상이다. “미-중 관계가 경쟁적인, 나아가 적대적인 관계로 가는 것은 한국 입장에선 굉장히 긴장해야 할 문제다. 예컨대 1970년대 상황을 보면 미국과 중국이 관계 개선을 하며 협력하는 상황이었지만 이와 상응해 한반도에 평화가 정착된 것은 아니었다. 미국과 중국이 자기네들의 갈등을 한반도로 외부화하는 것, 즉 남북한을 대리자로 움직여 분쟁이나 갈등을 만들려는 것을 지혜롭게 피해야 한다. 이걸 막으려면 다른 어떤 때보다 미국과 중국 중 어느 한쪽에 심하게 종속되거나 연루되는 상황을 피해야 한다. 병자호란 때 명나라 장수 모문룡이라는 사람이 철산 앞바다 가도라는 섬을 점령해 금나라를 견제한다는 명목으로 주둔하고 발호했다. 그러다가 정묘호란, 병자호란으로 이어졌다. 그러니까 남북이 미국과 중국 사이에 분쟁거리가 될 만한 일을 하면 절대로 안 된다.사드 배치 같은 것을 두번 다시 하면 안 된다.”
―미-중 갈등이 격화되면 미-소 냉전 때처럼 한반도 분단 극복과 평화정착을 추구하는 세력의 운신 폭이 좁아질 수 있겠다. “미-중 관계도 미-소 냉전처럼 갈 것이냐의 문제가 있다. 미-중 관계는 2차 세계대전 이후 미-소 냉전과 유사하긴 하지만, 실제 내용 면에선 상당히 다를 것이라고 본다. 유럽연합도 있고, 다른 나라들도 2차 대전 직후에 비해 국력이 성장했다. 현재의 세계는 2차 대전 직후보다 훨씬 다극화됐다. 또한 미국이나 중국이 2차 대전 직후 미국·소련처럼 세계의 우두머리로서 독점적 영향력을 발휘할 만한 국력이나 조건이 아니다. 한반도 내부 상황을 봐도 한국은 더 이상 약소국이나 개발도상국으로 볼 수만은 없고, 북한도 해방 직후와 비교해보았을 때 국제적 역량이 크게 상승했다. 남북이 상황을 바꿀 수 있는 절대적인 힘을 가진 것은 아니지만 스스로 뭔가 해볼 수 있는 여지는 해방 직후보다는 상대적으로 훨씬 커진 것이다.”
―결국은 자율적 외교 공간을 확대하는 것이 급선무인데, 그러기 위해선 한-미 동맹에 대한 재평가 또는 재조정도 필요할 것 같다. “사실 독일도 통일과 탈냉전을 이룩하는 과정에서 미국과의 동맹 관계를 근본적으로 변경하지는 않았다. 군사동맹은 어느 특정 국가나 특정 지도자의 정책만으로 결정되는 것은 아니고, 다수의 국가가 상호작용하는 객관적인 조건에 의해 만들어진 측면이 있다. 이 때문에 한반도의 평화정착을 위해 일거에 한-미 동맹 관계를 바꾸기는 힘들 것이다. 하지만 동맹에도 여러 수준과 차원이 있다. 한-미 동맹은 비대칭적이고 불균등한 동맹인데, 이러한 것들을 점진적으로 시정하는 조치가 필요하다. 전시작전통제권 전환은 지금 진행 중이고, 유엔군사령부도 문제가 될 수 있다. 사실 1970년대 초만 해도 일부 미국 관리들조차 ‘유엔군사령부는 한국전쟁의 시대착오적 유산’이라 보고 해체를 언급하기도 했다. 근대국가의 가장 큰 속성은 국경선을 확정하고, 그 영역을 확실하게 통제하는 것이다. 그런데 남북한의 경계선인 군사분계선과 비무장지대를 관리하는 기본 주체는 정전협정에 따르면 유엔군사령관이다. 유엔군사령관이 정전협정에 따라 비무장지대를 군사적으로는 관리한다고 해도 행정적인 문제나 환경문제 등은 유엔군사령관과는 별도로 남북 두 정부가 관리해야 할 것이다. 대한민국이 경제·정치적으로 과거와 비교할 수 없는 높은 수준의 국가가 되는데, 당연히 남북의 경계선 관리도 시대에 맞게 조정돼야 한다. 이러한 작업이 너무 지체됐다고 생각한다.”
―미국과 협상할 때는 힘의 비대칭성이 늘 문제가 된다. “미국의 힘이 압도적이기 때문에 한국은 여기에 맞춰가거나 순응하는 것 이외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제일 중요한 것은 한국이 한반도 문제의 당사자라는 점이기 때문이다. 우리 문제이기 때문에 한-미 간 역량 차이가 있어도 한국이 제대로 된 여론을 조성하고 합리적인 정책을 내걸고 밀고 나간다면 자신의 입장을 관철시킬 여지는 충분히 있다. 독일도 마찬가지였다. 서독이 60년대 말 동방정책을 추진했을 때 미국 관리들이나 미국의 주류세력들은 대부분 여기에 비판적이었다. 하지만 결국 미국도 그 흐름을 뒤집지 못하고 맞춰 갔다. 독일과 한국의 역량 차이가 있지만 21세기의 대한민국이 1960년대 말의 서독과 비교해봤을 때 그렇게 현저하게 뒤처지는 나라는 아니라고 본다. ‘우리는 어차피 안될거야’라고 생각하는 게 제일 큰 문제라고 본다.”
―북핵 문제 해결도 쉽지 않아 보이고, 항구적인 한반도 평화정착에 대한 기대도 줄고 있다. “북핵 문제가 30년이 되다 보니 이런 해법 저런 해법 다 이야기해봐도 해결이 안 되고, 그래서 많은 사람이 절망에 빠져 있는 것 같다. 이런 탓에 ‘북핵이고 남북관계고 다 집어치우자’, ‘북한은 없는 셈 치고 그냥 우리끼리 멋있게 잘 살자’라는 정서도 나타나는 것 같다. 그러나 우리가 분단을 잊고 외면할 수는 있겠지만, 그렇다고 분단의 조건과 문제점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코로나19 위기 사태를 겪어보니, 역시 한 국가가 가진 약점은 반드시 중요한 위기의 순간에 여지없이 드러나며 발목을 잡는 것 같다. 미국 사회가 가진 근본적인 약점, 인종 차별 문제가 코로나 위기 속에서 불거지는 것처럼 말이다. 한반도가 정전 상태에 머물며, 남북의 군대가 이렇게 심각하게 대치하고 있는 상태에서는 언제든 전쟁 위기가 발생할 수 있고, 한반도의 정세는 여러 차원에서 유동적일 수밖에 없다.”
이용인 한겨레평화연구소장 yyi@hani.co.kr
2020-06-29 한겨레 원문보기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70년이 지났지만, 한반도의 평화는 여전히 냉전과 분단의 그늘 밑에 놓여 있다. 남북관계는 주기적으로 롤러코스터를 타고, 한반도 주변국들은 현상유지와 현상변경 간의 힘겨루기를 하며 흙먼지를 일으키고 있다. 홍석률(55) 성신여대 사학과 교수는 지난 24일 한겨레신문사에서 진행한 인터뷰에서 “한반도에서 평화를 유지하는 제도적이고 구조적인 장치가 대단히 취약하다”면서도 “남북한이 스스로 뭔가 해볼 수 있는 여지는 해방 직후보다는 상대적으로 훨씬 커졌다”고 진단했다. 홍 교수는 한반도 분단사를 냉전사 맥락에서 연구해온 학자로, 현재 한국냉전학회 부회장을 맡고 있다. ―최근 상황에서도 볼 수 있듯이, 한반도 정세는 불안한 평화와 긴장 고조의 반복이 ‘뉴노멀’이 된 것 같다.
“2018년 남북정상회담 무렵 사람들이 기분 좋게 평양냉면을 먹으러 다닌 것이 엊그제 같은데, 최근엔 남북의 군사충돌 위험까지 운운하기도 했다. 한반도 상황이 변덕스러운 근본적인 이유는 평화를 유지하는 제도적이고 구조적인 장치가 대단히 취약하기 때문이다. 한반도에서 평화를 유지하는 유일한 제도적 장치는 정전협정인데, 국가와 국가 사이의 협정이 아니라 군사적인 문제에 국한해 군사령관끼리 맺은 협정에 불과하다. 군사분계선 정도를 제외하면 정전협정에 있는 대부분의 조항은 현재 지켜지지 않고 있다. 중립국감독위원회는 1950년대부터 주요 기능을 상실했고, 정전협정에서 제일 중요한 기구인 군사정전위원회는 1990년대부터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다. 결국 한반도의 평화는 어떤 제도적 장치를 통해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양쪽의 전쟁 억제력에 의존하여 유지되는 형편이다. 이런 상황은 당연히 유동적일 수밖에 없다. 또한 한반도 문제에 관계하는 것은 남북한뿐 아니라 주변 강대국이 있는데 모두 세계적인 강대국들이어서 문제가 복잡하다.”
―김대중, 노무현, 문재인 정부에선 적극적인 평화환경 개선을 시도했고 북한도 일정하게 호응한 측면이 있는데 근본적인 질서의 전환을 가져오지는 못한 것 같다. 제도적·구조적 제약을 뛰어넘지 못하는 남북의 영향력 한계를 보여주는 것일까? “올해가 한국전쟁 70주년인데, 전쟁의 공식적인 종결 없이 정전 상태로 70년을 가는 것은 동서고금의 역사에서 유례를 찾기 힘들다. 평화정착을 위해선 전쟁을 했던 당사자들이 평화협정을 맺는 것이 가장 확실한 방법이지만, 사실 세계적으로도 2차 대전 이후 평화협정으로 전쟁을 깔끔하게 정리한 사례가 많지 않다. 그렇다면 종전선언을 한다든지, 아니면 전쟁에 참여했던 나라들이 실질적으로 모두 관계 개선을 하면 평화가 정착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한반도에선 이런 실질적인 평화정착마저도 문제가 있다. 북한과 미국, 북한과 일본의 관계 개선이 안 됐기 때문이다. 이 부분을 근본적으로 바꾸지 못해 유동성이 계속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그동안 한반도 냉전, 분단 체제를 해체하려는 세력의 노력이 헛수고였느냐고 묻는다면, 저는 절대로 ‘그렇지 않다’고 대답할 것이다. 한반도 상황은 ‘다소 평온한 대치 상태’와 ‘전쟁 위기’를 왔다 갔다 하는 것인데, 그나마 최악의 사태로 가는 것을 예방하려는 나름의 노력과 움직임으로 상황을 그때그때마다 반전시켜왔기 때문에 전쟁 재발이라는 파국만은 막을 수 있었다. 긴 흐름으로 보면 지금의 남북관계나 북-미 관계는 과거에 비하면 진전된 측면도 확실히 있다.”
―북-미 정상회담을 두차례 했지만, 존 볼턴 회고록을 보면 북-미 관계에 실질적인 진전이 있었다고 평가하기는 어렵지 않을까? “그래도 좋은 선례를 남겼다고 볼 수 있다. 과거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었던, 북한의 정상과 미국 대통령이 만났다는 사실 자체가 이전과 비교하면 상황을 많이 바꿔 놓은 것이다. 남북관계든 국제관계든 정치인들은 정치적인 이해관계 때문에 행동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게 정치인 개인만의 이해관계는 아니다. 기본적으로 정치인들은 자기들 국민의 요구에 부응해야 하므로 여론을 신경 쓸 수밖에 없다. 따라서 북-미 정상회담은 트럼프이기 때문에 가능한 부분도 있지만, 성사 과정에는 적어도 60% 정도는 이 땅에서 한반도 평화를 추구했던 세력의 노력, 북한이 미국과 대화하려고 노력한 것, 그리고 미국 내에서 전쟁을 원하지 않는 여론 등이 밑바탕에서 작용한 것으로 본다. 그래서 트럼프 대통령이 재선에 실패하고 새로운 미국 행정부가 들어선다 하더라도 북-미 대화를 지지하는 물밑 토대는 상당 부분 남아 있을 것으로 본다.”
―코로나19 이후 미국과 중국의 갈등이 격화되는 양상이다. “미-중 관계가 경쟁적인, 나아가 적대적인 관계로 가는 것은 한국 입장에선 굉장히 긴장해야 할 문제다. 예컨대 1970년대 상황을 보면 미국과 중국이 관계 개선을 하며 협력하는 상황이었지만 이와 상응해 한반도에 평화가 정착된 것은 아니었다. 미국과 중국이 자기네들의 갈등을 한반도로 외부화하는 것, 즉 남북한을 대리자로 움직여 분쟁이나 갈등을 만들려는 것을 지혜롭게 피해야 한다. 이걸 막으려면 다른 어떤 때보다 미국과 중국 중 어느 한쪽에 심하게 종속되거나 연루되는 상황을 피해야 한다. 병자호란 때 명나라 장수 모문룡이라는 사람이 철산 앞바다 가도라는 섬을 점령해 금나라를 견제한다는 명목으로 주둔하고 발호했다. 그러다가 정묘호란, 병자호란으로 이어졌다. 그러니까 남북이 미국과 중국 사이에 분쟁거리가 될 만한 일을 하면 절대로 안 된다.사드 배치 같은 것을 두번 다시 하면 안 된다.”
―미-중 갈등이 격화되면 미-소 냉전 때처럼 한반도 분단 극복과 평화정착을 추구하는 세력의 운신 폭이 좁아질 수 있겠다. “미-중 관계도 미-소 냉전처럼 갈 것이냐의 문제가 있다. 미-중 관계는 2차 세계대전 이후 미-소 냉전과 유사하긴 하지만, 실제 내용 면에선 상당히 다를 것이라고 본다. 유럽연합도 있고, 다른 나라들도 2차 대전 직후에 비해 국력이 성장했다. 현재의 세계는 2차 대전 직후보다 훨씬 다극화됐다. 또한 미국이나 중국이 2차 대전 직후 미국·소련처럼 세계의 우두머리로서 독점적 영향력을 발휘할 만한 국력이나 조건이 아니다. 한반도 내부 상황을 봐도 한국은 더 이상 약소국이나 개발도상국으로 볼 수만은 없고, 북한도 해방 직후와 비교해보았을 때 국제적 역량이 크게 상승했다. 남북이 상황을 바꿀 수 있는 절대적인 힘을 가진 것은 아니지만 스스로 뭔가 해볼 수 있는 여지는 해방 직후보다는 상대적으로 훨씬 커진 것이다.”
―결국은 자율적 외교 공간을 확대하는 것이 급선무인데, 그러기 위해선 한-미 동맹에 대한 재평가 또는 재조정도 필요할 것 같다. “사실 독일도 통일과 탈냉전을 이룩하는 과정에서 미국과의 동맹 관계를 근본적으로 변경하지는 않았다. 군사동맹은 어느 특정 국가나 특정 지도자의 정책만으로 결정되는 것은 아니고, 다수의 국가가 상호작용하는 객관적인 조건에 의해 만들어진 측면이 있다. 이 때문에 한반도의 평화정착을 위해 일거에 한-미 동맹 관계를 바꾸기는 힘들 것이다. 하지만 동맹에도 여러 수준과 차원이 있다. 한-미 동맹은 비대칭적이고 불균등한 동맹인데, 이러한 것들을 점진적으로 시정하는 조치가 필요하다. 전시작전통제권 전환은 지금 진행 중이고, 유엔군사령부도 문제가 될 수 있다. 사실 1970년대 초만 해도 일부 미국 관리들조차 ‘유엔군사령부는 한국전쟁의 시대착오적 유산’이라 보고 해체를 언급하기도 했다. 근대국가의 가장 큰 속성은 국경선을 확정하고, 그 영역을 확실하게 통제하는 것이다. 그런데 남북한의 경계선인 군사분계선과 비무장지대를 관리하는 기본 주체는 정전협정에 따르면 유엔군사령관이다. 유엔군사령관이 정전협정에 따라 비무장지대를 군사적으로는 관리한다고 해도 행정적인 문제나 환경문제 등은 유엔군사령관과는 별도로 남북 두 정부가 관리해야 할 것이다. 대한민국이 경제·정치적으로 과거와 비교할 수 없는 높은 수준의 국가가 되는데, 당연히 남북의 경계선 관리도 시대에 맞게 조정돼야 한다. 이러한 작업이 너무 지체됐다고 생각한다.”
―미국과 협상할 때는 힘의 비대칭성이 늘 문제가 된다. “미국의 힘이 압도적이기 때문에 한국은 여기에 맞춰가거나 순응하는 것 이외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제일 중요한 것은 한국이 한반도 문제의 당사자라는 점이기 때문이다. 우리 문제이기 때문에 한-미 간 역량 차이가 있어도 한국이 제대로 된 여론을 조성하고 합리적인 정책을 내걸고 밀고 나간다면 자신의 입장을 관철시킬 여지는 충분히 있다. 독일도 마찬가지였다. 서독이 60년대 말 동방정책을 추진했을 때 미국 관리들이나 미국의 주류세력들은 대부분 여기에 비판적이었다. 하지만 결국 미국도 그 흐름을 뒤집지 못하고 맞춰 갔다. 독일과 한국의 역량 차이가 있지만 21세기의 대한민국이 1960년대 말의 서독과 비교해봤을 때 그렇게 현저하게 뒤처지는 나라는 아니라고 본다. ‘우리는 어차피 안될거야’라고 생각하는 게 제일 큰 문제라고 본다.”
―북핵 문제 해결도 쉽지 않아 보이고, 항구적인 한반도 평화정착에 대한 기대도 줄고 있다. “북핵 문제가 30년이 되다 보니 이런 해법 저런 해법 다 이야기해봐도 해결이 안 되고, 그래서 많은 사람이 절망에 빠져 있는 것 같다. 이런 탓에 ‘북핵이고 남북관계고 다 집어치우자’, ‘북한은 없는 셈 치고 그냥 우리끼리 멋있게 잘 살자’라는 정서도 나타나는 것 같다. 그러나 우리가 분단을 잊고 외면할 수는 있겠지만, 그렇다고 분단의 조건과 문제점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코로나19 위기 사태를 겪어보니, 역시 한 국가가 가진 약점은 반드시 중요한 위기의 순간에 여지없이 드러나며 발목을 잡는 것 같다. 미국 사회가 가진 근본적인 약점, 인종 차별 문제가 코로나 위기 속에서 불거지는 것처럼 말이다. 한반도가 정전 상태에 머물며, 남북의 군대가 이렇게 심각하게 대치하고 있는 상태에서는 언제든 전쟁 위기가 발생할 수 있고, 한반도의 정세는 여러 차원에서 유동적일 수밖에 없다.”
이용인 한겨레평화연구소장 yyi@hani.co.kr
2020-06-29 한겨레 원문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