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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Now6년전 아버지따라 ‘평양 불시착’…북한 과기대 한 학기 다녔어요

통일문화재단
2020-08-05
조회수 1649

2014년 8월 말, ‘남한 국적’의 그가 초등학교 3학년 여동생의 손을 잡고 북한 평양과학기술대학(평양과기대) 학교 식당으로 들어서자 식사하던 북한 학생 500여명의 눈이 일제히 그들에게 쏠렸다. 교복도 입지 않은 낯선 외부인의 예고 없는 등장에 학생들은 적지 않게 놀라는 눈치였다. 경북 포항에서 태어나 중국 옌볜(연변) 국제학교의 고3이었던 정문영(23·캐나다 토론토대 4학년)씨의 ‘평양 불시착’은 설렘과 낯섦의 교차점에서 출발했다.


지난달 29일 서울숲 신촌살롱에서 통일교육협의회의 후원으로 한겨레통일문화재단이 주최한 ‘제2회 통일문화살롱’ 행사에서 문영씨는 그해 8월 말부터 12월 초까지 석달 남짓 평양과기대를 다니며 ‘그곳’ 학생들과 함께 웃고 울며 부대꼈던 특별한 경험을 나눴다. 당시 평양과기대 박사원장이었던 그의 아버지 정진호 한동대 교수도 이날 행사에 참석했다. 정 교수는 “서울대 공대를 나온 뒤 매사추세츠공과대(MIT) 박사후과정을 밟던 중 민족의 상생과 통일의 비전을 갖게 됐다”며, 평양과기대 설립부총장으로 2003년부터 북한을 출입했다고 밝혔다.


문영씨의 평양과기대 입학은 ‘농담’처럼 시작됐다고 한다. 북한 쪽은 좀 더 젊은 외국 교수들이 학교에 와서 강의를 해주기를 원했다. “자녀교육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는 정 교수의 대답에 북한 쪽 총장은 “우리가 해결해줄 테니 당장 데려와 보라”고 했다. 정 교수는 “그러면 다음 학기에 제 아이들을 데려올까요?”라고 웃으며 반문했다고 한다. 하지만 농담은 진지한 고민으로 이어졌다. 결국 2014년 여름방학 때 연변 집으로 돌아온 정 교수는 문영씨에게 평양과기대 입학 의향을 물었다. 문영씨는 “이제 고3”이라며 어이없다는 반응을 보였지만, 그의 속마음은 평양을 가는 쪽으로 움직였다. 남북 학생이 같은 학교에 다니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없는 경험이었기 때문이다. 문영씨는 “북한을 오가는 사람들이 많은 연변이라는 특수한 지역에서 성장했기 때문에 북한에 대한 두려움이나 적대감은 별로 없었다”고 말했다.


학교 식당 방문 며칠 뒤 들뜬 마음으로 첫 등교를 했지만 문영씨는 30분 만에 ‘쫓겨나다시피’ 교실을 나와야 했다. 그가 들어서자 30여명의 학생은 미리 통지를 받지 못한 듯 안절부절못했다. 반장이 다가와 “어떻게 왔냐”고 물어본 뒤 교실을 ‘뛰쳐’나갔다. 잠시 뒤에 들어온 북쪽 교직원들은 문영씨를 집으로 돌려보냈다. 정 교수가 ‘정말로’ 자녀를 데리고 학교에 나타나자 북한 쪽 관리자들은 당황한 것처럼 보였다. 그들은 “‘상부의 지령’이 떨어지지 않았으니 며칠만 기다려달라”며 문영씨의 입학을 위해 동분서주했지만 결정은 쉽사리 이뤄지지 않았다. 그렇게 40여일이 흘러 문영씨의 생일인 10월9일, 정 교수가 학교로 출근을 하는데 미화원이나 경비원 등 모든 북한 쪽 사람들이 “축하한다”는 말을 건넸다. 전날 저녁에 드디어 입학 허가 결정이 났다는 것이다. 여동생은 평양시내 외교관 자녀들이 다니는 평양외국인학교에 다니게 됐다.


정 교수는 “분단의 장벽 한 귀퉁이를 허무는 사건”이었다고 회고했다. 문영씨는 40여일간의 공백기에 북한 학생들과 친해지기 위해 아침·점심·저녁 식사 약속을 꽉 차게 잡았다. 학생들의 방과후 시간에는 농구·축구 등 운동을 하는 곳을 찾아가 몸으로 부딪혔다. 덕분에 그가 공식적으로 입학 허가를 받고 당당하게 첫 등교를 했을 때 북한 학생들은 그를 반갑게 맞았다. 문영씨는 “어찌 보면 40일이 ‘신의 한 수’”라며 웃었다. 자본주의 경제학을 가르치는 과목에 대해서도 북한 학생들은 상당한 열정을 보였다고 한다. 문영씨는 “전문용어들에 대해 학생들이 생소했겠지만 수업 몰입도도 높고 질문도 굉장히 많이 했다”고 전했다. ‘넘을 수 없는 선’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북한 학생 2명과 허물없이 지내는 사이도 됐다.


하지만 애초 두 학기로 계획했던 문영씨의 평양과기대 등교는 한 학기로 끝났다. ‘돌아오지 않으면 졸업장을 줄 수 없다’는 옌볜 국제학교의 반대 때문이었다. 문영씨는 이듬해 5월 평양의 친구들과 ‘마지막’ 인사를 하기 위해 2주 동안 평양과기대를 다시 방문했다. ‘친한 형님’이 녹음기를 꺼내며 문영씨의 목소리를 담아 간직하고 싶다고 했다. 문영씨는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통일된 한반도에서 꼭 다시 만나자’는 메시지를 담았다. 그 형님의 마지막 인사는 ‘열심히 공부해 연구원으로 해외에 나와 문영씨를 다시 만나겠다’는 거였다.


문영씨는 “북한에 대한 경직된 이미지가 북한 사회의 일부분이라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면서도 “하지만 거의 반년을 함께하면서 그분들의 감정을 느꼈다”며, 지금도 북한에서 사귄 학생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리다고 했다. 정 교수는 “어른들은 가까워지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만 아이들은 순식간에 가까워진다”며 “70년 분단의 장벽을 허무는 역할을 위해선 청년 세대들을 함께 붙여놔야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평양의 국제대학’인 평양과기대는 한반도 평화와 북쪽 사회의 국제화 및 북한 경제 자립을 목적으로 2002년 6월 평양 낙랑구역에 착공해 2009년 개교했다.


이용인 한겨레평화연구소장 yyi@hani.co.kr


2020-08-03 한겨레 원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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